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 발발 (문단 편집) ==== 스탈린 주도설의 문제점 ==== 스탈린 주도설의 문제점은 전통주의 학설에 대한 비판과 동일하다. * '''모든 원인을 소련의 야욕에서 찾는다.''' 기본적으로 1950년대 이후 모든 전쟁은 소련의 야욕,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즉 개인적인 욕망과 동기를 중시하기에 다른 국제적인 상황이나 대한민국의 국내사정을 평가하지도 분석하지도 않았다.[* 괜히 브루스 커밍스의 서적이 큰 이슈를 만든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논의되지도 않았던 한국의 사회모순을 잘 분석했기 때문이다. 물론 2부는 망작이 되었지만] 스툭은 대놓고 6.25 전쟁에서 한국인들은 1876년 이후 일본, 러시아 등에게 의해서 지배된 나라로 독립적으로 자신의 국가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기에 전쟁도 그들 스스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평가절하했다. * '''소련문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 비록 소련문서가 조작가능성이 존재하며, 전면공개가 아니라 선별된 자료만 공개되었다는 점은 소련문서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소련의 자료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또한 당시 자료를 공개하던 시점은 러시아 건립이후 옐친정부의 개방정책에 기인했으며, 문서를 조작할 요인도 적다.[* 옐친은 소련을 해체한 당사자이며 러시아 공산당과는 8월 쿠데타, 러시아 헌정위기를 거치며 원수지간이었다.] 거기에 소련자료는 해명되지 않았던 많은 부분의 의혹을 해소시켜주기도 했다. 비록 교차검증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자료의 신빙성을 부정하는 것은 타당하도 보기 어렵다. * '''내전적 성격을 무시하는 경향''' 당시 국내상황은 혼란이었다. 38선에서는 국지전이 지속적이었고, 후방에서는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처럼 국내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심지어 6.25 전쟁 초기 8사단의 경우 강원도 일대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부대를 분산배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부대들도 비슷했다. 이런 국지전의 상황이 분명 전쟁의 발발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스탈린 주도설에서는 이러한 국내상황을 무시한다. * '''김일성 과소평가와 스탈린 과대평가''' 아무리 김일성이 말단직원이고, 그 위치가 미약했으나 분명 전쟁을 기획하고 준비했던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 수천키로미터를 48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은 강력한 전쟁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8시간이 걸리지만 당시에는 기차로 수십일을 가야했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 48번이나 찾아갔다는 것은 정말로 강한 야심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을 김일성이 풋내기 정치인이라고 무시하는 점은 무리가 있다. 또한 스탈린이 비록 공산사회의 지도자라고 하지만 전세계의 모든 전쟁을 일일이 기획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아시아는 소련에게 변경인데 이러한 곳까지 세밀하게 계획했다는 것은 어패가 있다. 실제로 국공내전당시 소련이 중공에게 지원한 물자는 동구권 국가들에게 지원한 물자보다 적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